이병철 "外資로 공장 1000개 세우자"…박정희 정부 '수출입국' 방향 제시

입력 2019-04-26 17:44  

이영훈의 한국경제史 3000년
(50) 도움은 어디에서



貧者의 쇼핑리스트

한국 경제의 성장률은 1963년 갑자기 9.2%로 뛰어올랐다. 고도성장은 1997년까지 이어졌다. 그 35년간 한국 경제의 연간 성장률은 평균 9.1%나 됐다. 같은 기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성장률이었다. 도움은 어디에서 왔는가.

1961년 5월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부는 “국가 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이전 이승만 정부가 국가의 독립과 국격(國格)의 고수를 위한 정치제일주의에 충실했다면, 이후 박정희 정부는 빈곤 퇴치와 경제 자립을 위한 경제제일주의에 매진했다. 군사정부는 곧바로 경제기획원을 설립했다. 기획원은 개발계획 수립, 정부예산 편성, 외자·기술 도입과 배분을 핵심 기능으로 했다. 기획원은 예산편성을 지렛대로 정부 각 부처를 통제하고 조정했다.

1962년 군사정부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차후 5년간 내외자(內外資) 25억달러를 투자해 110개의 기간시설을 건설하고 연간 7.1%의 성장을 이루겠다는 계획이었다. 흔히들 이 경제개발계획이 고도성장을 몰고 온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계획을 잘 세워 경제개발에 성공한 나라는 없다. 25억달러의 투자자금이 어디에 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110개 기간시설의 우선순위와 산업연관에 대한 평가도 없었다. 한국 정부의 개발계획에 대해 미국의 원조 당국은 빈자(貧者)가 희망하는 쇼핑리스트에 불과하다고 비아냥거렸다.

세계 시장의 변화

세계대전 이후 자본주의는 이전의 비관적 전망을 깨고 커다란 번영을 구가했다. 1950∼2000년 세계경제의 실질 생산은 6.8배나 성장했다. 연평균 3.9%의 고성장이었다. 세계사에서 전례가 없는 현상이었다. 급속한 기술혁신과 자유무역이 그 원인이었다. 같은 기간 세계의 수출은 50배나 증가했다. 무역이 세계경제의 성장을 견인한 것이다.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은 각국의 관세율을 낮추고 무역장벽을 해소하는 국제회의를 몇 차례나 소집했다. 1967년까지 주요 국가의 관세율은 평균 10% 이하로 낮아졌다. 세계는 드넓은 자유시장으로 통합됐다.

더불어 산업의 국제 간 재배치가 이뤄졌다. 선진국의 노동집약적 경공업은 어딘가 후진국으로 옮겨가야 했다. 급속한 성장에 따라 임금이 오르고 노동력이 부족해졌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선진국이 후진국의 공산품을 수입하는 새로운 국제시장이 열렸다. 1950년 그 시장의 규모는 13억달러에 불과했지만 1969년까지 89억달러로 팽창했다. 능력과 의지만 있으면 후진국이 공업화를 이룰 기회가 왔다. 이전 제국주의 시대에는 꿈꾸기 힘든 시장이었다.

이 시장을 맨 먼저 향유한 것은 일본이었다. 전쟁 이후 일본의 대미 수출은 일본 공업의 재건에 따라 직물·섬유, 철강, 차량·선박, 기계 등으로 다변화하고 고도화했다. 의류·신발·가구 등 잡제품의 수출도 꾸준히 증가했다. 1962년 일본의 대미 수출에서 잡제품의 비중은 26%나 됐다. 1956년 일본 경제는 전쟁 이전 수준을 회복했으며, 뒤이어 중화학공업화에 들어갔다. 일본의 수출산업도 구조적 재편이 불가피했다. 노동집약적 경공업품의 수출은 다른 후진국에 넘길 수밖에 없었다.


1950년대의 유산

1962년 한국의 성장률은 목표치 7.1%에 훨씬 못 미치는 2.1%였다. 수출도 목표치 6090만달러에 미달하는 5480만달러였다. 군사정부의 앞날은 암울해 보였다. 이때 군사정부를 구한 것은 공산품의 수출이었다. 1962년 말부터 수출이 이상하게 증가하기 시작했다. 1963년의 수출실적은 목표치 7170만달러를 훌쩍 넘은 8380만달러였다. 아무도 기대하지 않은 공산품 수출이 크게 증가한 덕분이었다. 수출계획의 주력 상품은 전통적으로 농수산물과 광산물이었다. 공산품의 수출계획은 640만달러에 불과했지만 결과적으로는 2810만달러의 실적을 거뒀다. 한국 같은 후진국이 공산품을 수출하다니! 1963년의 무역업계는 그런 놀라움으로 연중 내내 술렁였다.

수출의 3대 총아는 철강, 합판, 면포였다. 철강재는 가재·통·지붕·담장의 재료로 쓰이는 아연도철판(亞鉛鍍鐵板·함석)을 말한다. 1950년대 말부터 시설 과잉에 빠진 철강업계는 수출을 시도했다. 1962년 일신제강이 47만달러의 ‘처녀수출’에 성공했다. 1963년에는 베트남으로 1211만달러를 수출하는 ‘대박’을 터뜨렸다. 가격경쟁에서 일본을 능가했기 때문이다. 대성목재의 합판이 미국 시장을 개척한 것은 1960년의 일이었다. 그해 수출은 1만5000달러에 불과했지만 품질이 일본산보다 좋다는 시장의 호평에 힘입어 1963년에는 675만달러라는 제2의 대박을 터뜨렸다.

면방직업 역시 일찍부터 수출시장 개척에 나섰다. 1958년 시작된 면직물 수출은 1962년 미국에만 183만달러어치를 수출해 미국 통상 당국으로부터 한국산 직물 수입을 억제하겠다는 통보를 받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1963년에는 미국에 297만달러의 면포를 수출함과 동시에 유럽경제공동체(EEC) 시장까지 개척해 총 414만달러라는 제3의 대박을 터뜨렸다.

1963년 말 군사정부는 민간정부로 이양했다. 대통령 선거는 힘겨운 승리였다. 박정희 대통령을 도운 것은 세계 시장의 구조 변화였다. 그는 천운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또 하나의 큰 도움이 있었다면 박 대통령은 한 번도 감사의 뜻을 표한 적이 없지만, 이전 이승만 정부가 일으킨 민간공업이었다. 또 하나의 보다 깊은 역사적 유산이 있었으니 유능한 기업가집단이었다.


기업가집단의 대두

초기 2년간 군사정부의 경제정책은 혼미를 거듭했다. 혁명세력 일부와 대학의 경제학자들은 농업과 중소공업에 기초한 점진적 공업화와 내자(內資)의 동원을 주장했다. 1962년 6월의 통화개혁은 이들 자력갱생파에 의해 주도됐다. 통화개혁의 실패와 더불어 이들은 경제정책 일선에서 퇴조했다. 군사정부는 점점 기업가집단과 엘리트 관료들이 주도하는 외자 도입과 대기업 육성을 기조로 하는 개발정책으로 경도돼 갔다.

1961년 7월 주요 기업가 14명을 창립 멤버로 하는 한국경제인협회가 결성됐다. 이들은 미국과 유럽을 순방한 다음 울산에 정유, 비료, 제철, 기계 등 주요 공업시설을 유치하는 대규모 공업단지를 건설할 것을 군사정부에 건의했다. 울산공업단지는 1962년 2월 착공됐다. 뒤이어 정부는 기업의 차관 도입에 정부가 보증을 서는 법률을 제정했다. 이로써 정부와 기업이 국가 경제 개발을 위해 전면 협조하는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1963년 이병철 한국경제인협회 회장은 한국일보에 ‘우리가 잘사는 길’이라는 글을 5회에 걸쳐 연재했다. 그는 자연자원과 자본 축적이 빈곤한 한국 경제가 농업부터 시작하는 산업혁명의 고전적 코스를 뒤쫓을 여유가 전혀 없다고 주장했다. 그가 제안한 비상수단은 향후 10년간 23억달러의 차관을 도입해 1000개의 대규모 공장을 세우자는 것이었다. 그러면 뒤를 이어 중소공업과 유통업, 나아가 농업이 발전하게 된다는 논리였다. 강단 경제학의 고리타분한 이론을 넘어 기업가들이 제안한 창의적 개발정책은 이후 박 대통령에 의한 국가 경제의 공학적 건설과 세계 경영의 경제학으로 발전했다.

수출입국의 깃발

1963년 한국경제인협회는 조사단을 일본에 파견해 한국으로 넘어올 공업을 물색했다. 일본의 기업가들은 숨김없이 말했다. “일본이 기대하는 것은 싸고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노동력이다.” 한국의 기업가들은 이 같은 공업입지의 국제적 이동을 분봉(分蜂) 현상에 비유했다. 그것을 놓칠 수는 없었다. “바가지를 들어라.” 당시 한국경제인협회의 사무국장이 남긴 유명한 말이다. 1964년 정부는 수출을 무역정책으로서가 아니라 산업정책으로 다루는 수출진흥종합시책을 마련했다. 그해 11월 30일 수출이 1억달러를 돌파했다. 이후 그날은 ‘수출의 날’로 지정됐다.

드디어 1965년 1월 박정희 대통령은 국회에서 발표한 연두교서에서 수출을 ‘경제활동의 생명’으로 삼겠다고 선언했다. 전국 도처에서 수출입국(輸出立國)의 깃발이 높이 올려졌다. 넓은 세계 시장을 무대로 뛰는 것만큼 인간을 흥분시키는 건 없다. 그 모험과 성취의 시대가 한국인의 눈앞에 활짝 열리기 시작했다.

이영훈 < 前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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